관훈갤러리는 “김종숙 개인전” ARTIFICIAL LANDSCAPE 을 11월 30일부터 12월 13일까지 개최한다.
관훈갤러리 T. 02-733-6469
김종숙, 점경(點景) 아래 구축된 두 시층(時層)의 세계
1. 촘촘하게 크리스털(crystal)로 수놓아진 작가 김종숙의 <인공풍경> 연작(連作)은 구상성이 강하기에 쉽게 인식되는 경향을 띠지만 기실 그 내부엔 무의식적 수동(手動)에 따라 흐르는 비정형적인 피안(彼岸)의 세계가 집약(集約)되어있다. 그 집약은 행위적 측면에서 볼 때 마치 문인화의 정신적 본연(本然)이랄 수 있는 인본수양의 예(禮)와 절도의 예(藝)를 연상케 하며, 이는 자연스럽게 동시대미술에서의 ‘한국화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자문, 전통과 현대 사이에 놓인 해석의 분동(分銅)이 어떠한지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접할 때 우선적으로 우리네 감관(感官)은 시각이라는 촉수를 세우기 마현이며, 시각은 또 다른 감관(監觀)을 이끌어 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스와로브스키 엘리먼츠(SWAROVSKI ELEMENTS)라는 독특한 소재로 인해 김종숙의 작업들은 하나같이 영롱한 색과 빛을 내뿜고, 그로부터 비롯된 휘황함이 공긴을 감싸는 양태를 내보인다.
이어 각각의 크리스털로 낙점(落點)된 점점(點占)의 선(線)은 후면에 드리워진 실경 안팎을 오가며 이곳엔 사유(思惟)의 여백(餘白)이 터를 잡는다. 또한 특유의 장인적인 작업 프로세스(process)는 더딘 완성을 예상케 할 만큼 언제나 남다른 공력을 요하지만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간결하면서도 진중핚 아우라(aura)는 작가만의 진득학 화법(畵法)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는 나침반이 된다. 여기까지가 그의 작업을 처음 대하는 순간의 보편적 인상(印象)이자 김종숙 작업이 지닌 외적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집중력과 치밀함이 요구되는 그의 작업의 경우 고전작품에서 차용한 배경과 소재의 이질감이 되레 세련된 고귀성(高貴性)을 허용한다는 사실이다. 우선 앞서도 언급한 시각적인 화려함을 지닌 스와로브스키 엘리먼츠는 공판(孔版)으로 얹힌 <금강전도>나 <몽유도원도>에 흡수되어 희미하던 형상을 명징하게 나타내는 요소로 뒷받침되고, 형상은 다시 재료와 맞물리며 화제(畵題)를 확산시킨다.
이때 전통 산수에서 빌려온 외형은 크리스털로 인해 작가의 의중을 대리하는 기호로 치환되며, 그것은 형식적으론 지고(至高)의 효과를 지정함과 동시에 전통과 현대라는 혼성을 포괄하는 기표로 규정된다. 이를 옛 산수화의 필법과 비교하자면, 마치 운필(運筆)의 운용을 보는 냥 완급(緩急)·지속(遲速)·촉압(觸壓) 등이 고려된 전개와 맞닿는다. 특히 크리스털을 하나씩 밀착해 나가는 작업과정은 붓의 강약처럼 점으로 연결된 선(線)을 이끌어 하나의 드로잉을 완성하는 구조를 엿보게 하고, 크리스털을 하나의 점으로 간주할 때 그 변주(變奏)는 착시까지 불러오는 신비로운 점경(點景)을 낳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점의 운용으로써, 이것은 화면의 대담함 속에서 본래의 상(像)을 잉태시키는 선이 되며, 좌우-상하, 밀착과 간극의 유속 아래 이뤄지는 낙점과 조선 화공들의 시선과 감정을 자신의 인공선(人工線: 작가는 이를 인공선(artificial line)이라 칭한다.)으로 중첩시키는 방식이 절묘하고 무쌍한 변화를 생성하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옛 작품의 풍미와 기조를 동시대 가장 화려한 상징물(보석류 등)을 통해 새로운 차원에서 가공하는 행위와 갈음되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그림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닌, 전혀 다름을 갈구해온 작가 자신의 세계를 구현하는 그만의 스타일이자, 특정한 소재와 화제를 통해 이상적인 아페르토(aperto)를 완성하는 단초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여운은 궁극적으로 그의 작품을 보다 가치 있게 만드는 알고리즘(algorithm)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적게는 수만 개에서부터 수십만 개의 크리스털과 보석들이 한껏 빛을 머금다 내뱉는 과정 아래 생성되는 영롱한 <인공풍경> 시리즈는 관란객들에게 재현된 대상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그렇지만 정작 작가는 현대미술에 있어 종종 화두가 되곤 하는 재현은 물론 자기 동일성이 없는 복제를 가리키는 시뮬라크르(simulacre)로써의 개념에는 별다른 흥미를 두고 있지 않다. 본질적으로 원본의 성격과는 관계없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합당하지 않는데다가 아무리 뛰어난 미사어구를 들이댄다 해도 원자화된 혂대미술의 다양한 파편 중 하나로서만 가치를 지닐 뿐, 어떤 형식으로 구현(具現)되어지는 가에는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음이다. 대신 작가는 누구나 인지할 만한 옛 산수화를 우리시대의 풍경화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지각(知覺)의 수용에 방점을 둔다. 또한 작디작은 크리스털을 이용, 찰나로 명멸하는 빛을 회화 속으로 끌어 들이고 이를 다시 분산시켜 이미 존재하고 있던 복고예술의 이미지를 새로운 현대적 이미지로 탈바꿈시키는 것, 나아가 감관(感官)을 통해 올라온 지각이 시각의 목도를 넘어 객체의 입장에서 체감되는 과정을 중시한다.
그런 관점에서 김종숙의 작품을 표피적인 것에 국한하는 건 바란직하지 않다. 보편적으론 그것에 의식화되고 공고히 각인(刻印)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가 그린 작품들의 이면(裏面)을 보면 매우 조밀한 크기로 구축된 리얼리티(reality) 너머 화려함에 가려진 은폐된 이상(理想)을 가리키고 있으며, 외형에만 치우쳐 내형이 존재하지 않는 그림에 대한 숙고(熟考)와 모순적인 이접을 통한 한국화의 현대적 번안이라는 수사(修辭)가 배어 있다. 즉,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다른 시층을 하나의 화면에서 환영(illusion)적 시각언어로 드러냄으로써 그 연접으로 야기되는 시공간적 특성 자체를 거론하고, 동시에 질량을 달리하는 동시대미술의 조타를 생성하기 위한 초석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실재와 가상, 과거와 혂재, 순수와 물질자체라는 이원론이 부유하지맊, 실재이면서 가상이고 가상이면서 실재라는 점에서 다차원 시간세계를 아우른다. 그건 적어도 공간을 지정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시간의 층위에 관한 개념이다.”는 평론가 김복영의 해석은 유호하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김종숙의 그림들을 단번에 알 수 있을 만큼 뚜렷한 성격을 부여하는 근갂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김종숙의 근작들은 일정한 도식에 따라 정돈된 형태들 속에서 화면의 일부로 들어서 있는 집적된 점들과 만난 순수조형으로서의 가치(價値)가 작가 자신의 표현적인 가치보다 우세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 다채로운 변화로 이어지고 있는 작금의 작품들이다. 물론 때로 지나치게 장식적이다 싶은 부분이 없진 않지맊 캔버스의 한 귀퉁이를 훑고 지나는 선과 면, 도상들 사이에 부유하는 시간의 지층을 따라가다 보면 사유의 흔적들과 조우할 수 있고, 그렇게 소재와 형상의 조화에서 비롯된 회화성은 형상 너머의 세계마저 궁금케 하는데 아쉬움이 없다.
어쨌든 오늘날 김종숙의 <인공풍경> 연작은 크리스털과 인내가 빚은 빛의 농담(濃淡)이자 그 결정체로부터 비롯된 시각적 울림이지만 어떤 의미에 있어 신구의 개별적 단락이요, 통합의 운율(韻律)이며 장인적 기질 아래 가치 있는 회화를 만들려는 낯선 조타의 분출(噴出)이라 해도 그르지 않다. 더불어 누군가의 말처럼 그의 작업은 전통에 있어서의 ‘실재적(實在的)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깊이 분석하면서 자신만의 표출방식에 무리 없는 재량을 둔 채 독창적인 세계로 나아가기 위함을 알리는 자발적 전명(傳命)이라 해도 틀린 해석은 아니다. 다만 하나의 모뉴먼트를 세우기 위핚 복잡다단한 담금질에 있어 반드시 왜 이것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핚 자문은 유효하다 할 수 있다. 때문에 가끔은 스스로 순간의 지연을 염두에 두는 것도 고려해봐야 할 문제임에 틀림없다.
글. 홍경한(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