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시간의 스펙타클 — 김종숙의 <인공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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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서 근자에 이르는 김종숙의 <인공풍경> 연작에는 매화나 연화를 비롯해서 온갖 오방색의 꽃과 나비를 주제로 한 우리 민화와 겸재(謙齋)의 <금강전도>의 골격을 이루는 준(皴)을 캔버스에 전사한 다음, 원본의 주요 선의 일부나 전체를 따라 오스트리아산 크리스탈 스와롭스키와 유사보석을 재료로 지름이 2밀리미터 내외의 픽셀 같은 작은 크기의 투명하고 반투명한 흰색⋅노랑⋅빨강⋅흑갈색을 안착시킨 걸 볼 수 있다. 옛 그림의 선에다 자신의 인공(人工)선을 중첩시킴으로써 우리 옛 그림의 필선을 화려한 세공(細工)으로 단장시키는 가하면, 전혀 새로운 작가 자신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캔버스의 화려한 오방색바탕과 크리스탈 점경(點景)이 일구어내는 모상(模像)이 이를 데 없이 그윽한 게 이를 말해준다.
옛 그림의 도상을 다룸에 있어 김종숙은 배경작업으로 실크스크린을 능숙하게 구사한다. 공판작업으로 원작들의 일부나 전부를 캔버스에 전사한 후, 원작의 골격을 이루는 선의 흐름과 율동을 따라 촘촘하게 크리스탈을 붙여 원작의 선에다 인공선을 부착하는 기법을 개발하였다. 작가 자신이 이름한 ‘인공선’(artificial line)이라는 용어가 실감있게 느껴지는 건 붓을 사용한 원작의 선과는 달리, 인조 크리스탈과 유사보석의 파편을 사용해서 화조, 지형, 산세, 나아가서는 원작의 성격적 특성을 치밀하게 재현하는 숙련된 장인정신에서다.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작가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으로 원본의 선(線)을 그 자신의 선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마치 구스타프 클림트가 자신의 에로틱한 인체그림들에다 중세 비잔티움의 금장식에서 볼 수 있는 제례적이고 금속적인 빛을 가해 몽환적인 빛을 창출했던 걸 방불케 한다.
전체적으로 김종숙의 근작들이 보여주는 인상은 원작이 갖는 섬세유연한 필선들의 집합과 작가가 이와 유사하게 재맥락화한 인공선들의 집합 간에 존재하는 이중구조의 앙상블이다. 전자와 후자는 종종 어디가 선(先)텍스트이고 또 어디가 패러디한 텍스트인지 구별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의 전통민화나 겸재와 같은 특정 문화맥락이나 화맥을 떠나서 보자면, 그 하나하나는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 경우, 원본이 되고있는 유연한 선들은 오페라 아리아의 배경음악처럼, 작가가 구현하고 있는 인공선의 의미를 이해하는 바탕이 되기도 하고, 작가의 인공선은 이를 바탕으로 클림트의 빛을 발하는 몽환같은 독자적인 선율을 빚어내는 그 나름의 독자적인 위치를 갖는다. 선을 가운데 놓고 두 개의 대등한 선 패러다임이 자아내는 앙상블이 이 작가가 다루는 테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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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두 개의 선이 하나의 평면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해야 할 것 같다. 두 개의 선 가운데서 ‘인공 선’은 분명히 2천년 대를 살고 있는 특정 작가의 주체의 산물이다. 이에 반해, 작가가 원본으로 도입한 바탕의 선들은 비록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작가의 손을 빌려 캔버스에 전사되었지만, 이것들을 생산한 원주체는 민화에서처럼, 수 백년 전에 살았던 이름없는 자들이거나, 겸재같이 이름을 역사에 자리매김한 행복지자도 있다. 이하에서 겸재를 따로 떼어서 말하자면, 그가 <금강전도>를 그린 건 족히 이백년 전의 일이다. 격세지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두 개의 선들을 작가가 한 개의 공간에 불러들인 건 무엇 때문일까? 복수의 주체가 생산한 선들의 혼성체가 이렇게 해서 허용되었다는 걸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핵심은 두 개의 다른 선이 혼성되고 있다는 것과 이 두 선들을 책임지고 있는 주체들이 또한 혼성되고 있다는 거다.
이를 다루는 데는 기존의 서구비평담론이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패러디’(parody)라는 말로 시작해서 원본의 해체로부터 재맥락화를 거쳐 전유(專有, appropriation)에 이르고, 저자의 죽음(demise of the author)에 이르는 논의들이 김종숙을 다루기에는 부적절할 것 같다. 이 용어들이 유의미한 건 원래 탈근대주의자들과 해체주의자들의 사전 속에서다. 특히 이 말들을 빌려 서구 소비사회의 이미지 품목들을 다룰 때 뿐이다. 김종숙의 근자의 작업을 앞에 하고 그녀의 주체성이나 선과 관련한 문제를 해설할 때, 이들의 비평담론을 해석항으로 도입 하려면 적어도 다음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김종숙이 원본으로 등장시킨 겸재의 <금강전도>의 텍스트가, 예컨대 앤디 워홀의 <마리린>에서처럼, 원본을 전사하는 과정 자체가 작가의 존재이유라는 게 확실해야 한다. 여기에는 원본의 실질이 전복되고 기호나 흔적으로서 남아야 하는 것 까지를 포함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마침내 원본의 종적마져 증발해버리는, 이른 바 원본 없는 모상으로서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존재해야 한다.
이 두 개의 조건들이 김종숙의 작업에서는 충족되지 않는다. 가령, 겸재의 원본이라는 걸 작가가 실크기법으로 부분 또는 전체에 걸쳐 전사했지만, 이러한 전사 절차는 작가 자신의 인공선과 대응시키기 위한 조건으로서만 도입되었을 뿐이다. 결코 원본을 증발시킬 목적에서가 아니다. 작가의 언급으로 말하자면 ‘산수화를 우리시대의 풍경화로 재해석해 보려는 데 있다. 과거를 이해하지만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상상해보려는 데 있다’(「작업노트」2007). 이를 위해, 원본의 여러 면을 그대로 존속시키고 있고 원본이 증발되거나 시뮬라크르만이 존재할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없다. 보드리야르의 의미에서뿐 아니라, 플라톤의 의미에서도 시뮬라크르란 그녀에게선 가당치 않다.
일반적으로, 위의 두 가지 조건이 성립하려면 앞서 말한 겸재와 김종숙이 시사하는 주체의 차이와 격세지간에서 비롯된 텍스트들 간의 종(種)의 특성이 살아 있어서는 안된다. 예컨대, 듀샹이 모나리자를 가져와서 다빈치를 지우고 그 자신의 것으로 대치시켰다든지, 라우젠버그가 윌렘 데 쿠닝을 불러들여 <지워진 데 쿠닝>에서 그랬던 것처럼, 데 쿠닝을 지우고 새로 그리거나 고쳐 그렸어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일찍이 피카소가 베라스케즈의 <라스 메니나스>를 자신의 큐비즘으로 패러디한 데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김종숙의 근작들에는 이러한 뜻에서 주체의 죽음이나 원본 자체의 소멸이 존재하지 않는다. 원본과 작가들의 주체가 뚜렷이 공존한다. 소위 롤랑 바르트적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 김종숙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럴싸할 뿐이다. 그녀에게 있는 건 겸재의 텍스트에 대한 그녀 자신의 텍스트의 중첩과 공존이다. 그 두 개의 텍스트간의 대조와 차이가 무엇인지가 확연히 공개된다. <지워진 겸재>도 없고 <지워진 민화>도 그녀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말해, 원작의 주체이건 패러디하고 있는 작가의 주체건 ‘죽음’이 아니라 그대로 ‘함께 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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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근대주의 맥락을 제치고 김종숙의 근작들을 제대로 읽어낼 독법이란 과연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그녀의 평자들(고충환, 홍경환)이 패러디기법과 탈근대주의적 독법으로 예단해본 글들은 결코 무익하진 않다. 다만 정곡과 거리가 있을 뿐이다. 이들이 잘못 짚은 것은 그녀의 텍스트구성의 ‘매너’를 근접점(近接點, starting point)에서 보지 않고 원접점(遠接點, punctum remotum)에서 보았다는 거다.
그녀에 관한 근접점은 두말할 것 없이 크리스탈의 선이 만들어내는 집합으로서의 드로잉이고 끝내는 선이다. 작가의 용어로 말하자면 “Crystallized from painting to drawing”이다. 그녀의 다음 언급이 그렇다.
어린 시절, 아이러닉하게도 우리 집 분위기는 현대적인 것과 ‘복고’가 공존하고 있었다. 집 근처에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는 나전공방이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의 전통산수화나 화조화를 그려 대형 나전칠기의 밑그림으로 사용하셨다. 작업실에는 ‘전통그림들’이 넘쳐났고, 나는 그곳에 들어가 산수화집과 민화집을 보곤했다. 그곳의 풍경은 너무도 생경하고 신비스러웠으며 거기에 나는 묘하게 이끌렸다.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동양의 스펙터클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아주 오랜 세월의 시간이 흘러갔다. 기억이 까마득할 정도로!
최근 몇 년동안, 기적같이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민화집을 보다가 문득 유년 시절의 기억들이 현재화하면서, 낯설지만 낯익은 이율배반의 이미지가 화면을 채우기 시작했다(「노트」, 2005에서 번안).
김종숙이 어떠한 연유에서 근작들의 정황에 이르렀는지는 아주 솔직한 데가 있다. ‘아이러닉하지만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이질적인 것의 혼성’이라든지, ‘전통회화의 이미지를 동시대적 재료인 크리스탈과 유사 보석을 빌려 드러내려 한다’는 거다. 그 핵심이 ‘페인팅’을 ‘드로잉’(선조線條화)으로 전이시킨다는 거다. 그녀의 언급이 이어진다.
작품 <전이된 회회>를 보면 기암절벽들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민화 금강산도>를 원본으로 해서 원작에 나오는 유토피아로서 금강산을 은유적으로 그리는 게 재미있었다. 기암절벽들을 나는 동시대의 우리네의 인물상으로 전환하는 한편, 이것들을 페인팅에서 드로잉으로 전이시켰다.
<선택된 드로잉>시리즈에서는 하나의 원본으로 6개의 드로잉을 만들었다. 원본 그림에서 얼마를 선택했는지를 수치로 제시하면서 “선택된 드로잉”을 제작하였다. 컬러드로잉을 위해서는 노랑⋅파랑⋅핑크의 세 화면을 연결시켜 동양적 파노라마를 보여주고자 했다(「노트」2006에서 번안).
‘전이’(轉移, transference)와 ‘선택’(選擇, selection)을 빌림으로써, 아니 그렇게 하기 위해 김종숙의 선화는 그 뿌리를 ‘동양적 파노라마’라는 아이디어를 내심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의 유년시절에 체험했던 ‘동양의 스펙타클’을 동시대의 것으로 재점화(再點火)함으로써 말이다.
이 시도는 일부 탈근대성과 해체주의적 분위기를 작품에 내재할 수 는 있으나, 본질적으로 그렇다고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작가의 언급대로 ‘과거를 현재와 매개함으로써 현존하는 과거와 현재로서의 과거를 이해하며, 이를 위해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시공간을 열고자 한다’(「노트」2007)는 걸 강조해야 한다. 이러한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역사주의’(Neo‐historicism)의 이해 틀로 읽어야 한다. 작가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선(線)의 문제를 역사의 과제로 이해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신역사주의는 우리 시대의 작품해석에 있어서 ‘시간’의 이해를 키워드로 한다. 독일의 신표현주의를 해석할 때, 시간이해의 키워드는 그들의 신화와 종교, 전쟁과 트라우마 같은 과거의 역사에 있었던 사건이나 이야기를 자신이 겪고 있는 현재의 시간을 통해서 도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적 이해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도상(아이콘)과 관련한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의 연접(延接, conjunction)과 이접(離接, disjunction)이 무엇인지를 비평은 말해야 한다. 이를 올바르게 다루기 위해서는 예술사회학이 신역사주의를 받쳐주어야 한다. 먼저는 기표의 구조적 측면에서 두 개의 시간이 어떻게 연접되는지를 말해야 하고, 이어지는 기의적 해석에서는 두 개의 시간이 어떻게 이접되는지를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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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숙에서 다루어야 할 도상의 핵심은 요컨대 선이다. 근작들에 등장하는 두 개의 ‘선’을 말해야 한다. 그녀에게서 ‘선’이라는 기표는 우선 ‘크리스탈로 표현된 선’(Crystalized line)으로 요약된다. 이 기표는 ‘과거를 현재에 매개함으로써, 현존하는 과거, 나아가서는 과거와 현재가 시간적으로 공존하는 시공간으로서의 도상적 징후(iconic symptom)’를 기의로 포함한다. 그녀는 자신의 선 기표가 기의적 징후를 함축하도록 하기 위해, 선드로잉이 갖추어야 할 최선의 도상을 필요로 하였다. 과거와 현재를 공존시키기 위해서다.
작가는 이를 시연하고자 과거(겸재준皴)와 현재(인공선)의 도상들을 유사(similarity)와 연장(extension)을 준거로 병존시켰다. 이것들은 모두 선 기표들로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의 표시(表示, signification)이고 차례로 선은 이를 외연으로서의 자질을 갖추도록 하였다. 이것들이 마치 두 개의 시간이 하나의 화면에서 등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구조화되도록 하였다. 겸재의 준과 작가의 인공선이 ‘시간의 화살’에서 볼 때, 시간의 역전을 통해서 가능한 것처럼 시연하였다. 두 개의 시간이 역전되어 하나의 시공간을 이루었다면 이건 하나의 역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김종숙은 바로 이걸 염두에 두었다. 과거는 현재로, 현재는 과거로 시간의 화살이 서로 가역적인 것처럼 비틀어 놓았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시간대칭(symmetry of time)의 맥락으로 겸재와 자신을 공존시켰다.
이 모습은 마치 두 세계의 시간기표가 일시적으로 결합되었다가 잠시후면 분리되어, 마침내는 독자적으로 복제될 것처럼, 이를테면 ‘허수의 시간t’를 빌려서 이루어졌다. 전(前)방향으로 나아가는 시간과 그 역(逆)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두 개의 시간 축이 잠시 만나 밀회를 즐기는 것처럼 이루어졌다.
이 시도는 현대 과학소설에 등장하는 ‘타임캡슐’을 방불케 하지만, 작품의 중심은 과거와 현재를 모두 떠나 어떤 허(虛)의 시간에서, 이를테면 미스터리 은하의 변두리에 존재하는 특이점, 아니면 이 경계에 등장하는 ‘무(無)시간’(timeless)이라는 야릇한 경계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적어도 김종숙의 작품에 등장하는 선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시간선’(timeline)으로서의 특징을 갖는다. 무시간의 경계에서 응고된 선이다. 이 선은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연기(緣起, extending‐arising)하는 확장 내지는 연장으로서의 선이고 기표다. 연기로서의 그녀의 선 기표는 단지 선일뿐이라는 의미의 유클리드적(Euclidean) 선이 아니라, 역사의 권역을 가로지르는, 시간과 시간을 잇는 곡면상의 선이자 리만적(Riemannian) 선이다. 겸재에서 볼 수 있는 수직준의 섬세유연함과 이 위에서 생존하고 있는, 투명성과 화려, 빛과 호사를 사랑하는 현대인의 욕망의 상징인 ‘크리스탈의 인공선’은, 한편으로는 과거의 인간적 자연과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인의 탈인간적 자연이라는, 결코 만날 수 없는 대척관계(antipodism)를 기의로 함축한다.
여기서, 그녀의 근작들의 기의적인 면이 보다 생생하게 드러난다. 차별화되는 두 개의 선들이 함의하는 이종(異種)결합(hybridization)이 시사하는 바가 그것이다. 두 개의 선들은 기의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적이다. 한쪽으로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적 자연관으로 보는 성(性)과 이(理)로서의 자연상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이와 대척점에 우리시대의 물신주의, 다시 말해서 인간성의 부재와 욕망의 대명사인 물성(보석)이 존재한다. 물성의 반복적인 도열이 빚어내는 선은 물신주의의 상징이자 소비사회의 기호(記號)를 시사한다. 작가가 이 일환으로 등장시킨 ‘스와롭스키’는 현대인간의 물신주의의 얼굴과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키치라는 이중적인 얼굴의 표상이다.
기의 면에서 두 개의 선들이 함의하는 바는, 이처럼 모순대타적이라할 만큼 이종적이고, 따라서 의미의 이접성(離接性)을 특징으로 한다. 스와롭스키가 자아내는 외관의 시각적 화려를 빌려 키치를 은폐하는 한편, 환상적인 스펙터클의 수사(修辭)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김종숙이 기의에 대해 갖고 있는 근본의도가 여기에 있다.
요컨대, 김종숙의 근작들은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시간연기(緣起)를 빌려 시각언어로서의 선을 연출하는 데 있다. 이접의 스펙타클로서의 환영(幻影, illusion)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이 환영은 결코 보드리야르의 공간적 시뮬라크르가 아니다. 시간적 연기의 필연적 소산이다. 그러기에 그녀의 선화를 놓고 그 특징을 스펙타클로 규정하더라도, 해체주의나 탈근대성의 목록에서처럼, 공간중심의 스펙타클은 결코 아니다. 시간의 연접이 야기하는 시공간적 특성 그 자체로서의 스펙타클이다. 실재와 가상이라는 탈근대주의자들의 이원론이 아니라, 실재이면서 가상이고 가상이면서 실재라는, 요컨대 양자택일이 아니라 ‘파라독스’로서 존재하는 다차원 시간세계의 아우라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김종숙의 스펙타클이다.
2009. 11. 김복영(미술평론가⋅서울예대 석좌 교수⋅전 홍익대 교수)
Spectacles of Lines and Time – Kim JongSook’s Artificial Landscapes
by Kim Bok-young (Art Critic & Doctor of Philosophy)
1.
Since 2006, for her cycle Artificial Landscapes, Kim Jong-sook transcribed folk paintings featuring plum blossom, lotus flowers, butterflies, and Gyomje Jeong Seon’s Panoramic View of Diamond Mountains, then applied transparent and translucent white, yellow, red, and dark brown Swarovski Crystals of about two millimeters in diameter. Kim recreates our old paintings’ brush lines by emphasizing them with luxurious of crystal-dotted landscapes, and ground in Obang-saek. (Obang is the five directions constituting the basis od our ancestors’ understanding of all things under the sun: east, west, south, north, and center.)
Kim is versed in the silkscreen technique, applied to her work’s ground. After transcribing the whole or part of an original to her canvas, Kim glues crystals to flow and rhythm of their lines. Unlike original lines rendered by brushes, these artificial crystal granules, or pseudo-gems, and her mature, artisan spirit. They help reproduce birds, flowers, topography, the physical aspect of a mountain, and moreover, the original’s characteristic features. Faithful to the original, she interprets original liens through her own distinctive interpretation. Like Gustav Klimt, who generated hypnotic light through ritualistic, metallic light, there in Byzantine gold decoration, and added it to his erotic drawings.
Kim’s recent work shows an ensemble of delicate, unrestricted, flowing lines of originals, and the gatherings of artificial lines re-contextualized by the artist.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the former and the latter beyond cultural context these lines demand each other equally. Flexible line of the originals become a base for the understanding of her artificial lines. Kim’s aritificial lines have their own role in generating independent rhythms. The thems Kim addresses is ensemble, between the paradigms of these lines….
2.
I have to explain why these two types of lines should exist in the same plane. The artificial lines are an outgrowth od a specific subject, living in the 2000s. Alternatively, the ground lines the artist appropriated from folk paintings and traditional landscapes were created hundreds of years ago. Jeong Seon’s Panoramic View of Diamond Mountains, for example, was rendered about two hundreds years ago. Why did she summon these two kinds of line to the same canvas? How can we judge this hybridization of lines produced through two different subjects? Essentially, these two kinds of lines are blended and created by two different subjects.
Critical discourse regarding the West may not be helpful in addressing this. Discussions about ‘parody’, ‘destruction of the original’, ‘re-contextualization’, or ‘demise of the author’ are perhaps inappropriate for dealing with Kim’s work. These terms are meaningful only in the dictionaries of the postmodernists and deconstructionists, or when addressing images of Western consumer society. The following two conditions could be met, to apply critical discourse to Kim’s recent work, and elucidate the problem of lines and subjects in her work. One is recognizing Kim’s work involves a process of transcribing an original (like Jeong Seon’s Panoramic View of Diamond Mountains) to denote the reason for her being. To overturn the oriental, she has to leave its marks or traces. The other is, realizing the artist must create a simulacra as an image without the substance or qualities of the original or its traces. But Kim’s work does not meet these two conditions.
Instead, the artist employed Jeong Seon’s original painting through silkscreen, to correspond to her own artificial lines. She never intended to vaporize the original. According to her artist’s statement of 2007, she “aims to reinterpret traditional mountain-and-water paintings, into landscapes of our times, and to imagine the future, based on an understanding of the past, without being confined to it”. To do this she preserves aspects of the original, without deleting the original, to leave simulacra.
The concept of simulacra, defined by Plato and redefined by Jean Baudrillard, cannot properly be applied to her work. If the two abovementioned conditions could be established the properties of each text – Gyeomje’s work and Kim’s subject – would not be conspicuous. As Marcel Duchamp deleted traits of Leonardo da Vinci through his reproduction of Mona Lisa, and Robert Rauschenberg did the same with his Erased de Kooning Drawing, Kim modifies the originals she employs. The origin of this attempt can be found in Pablo Picasso’s parody of Diego Velazquez’s Las Meninas (The Maids of honor), there in his cubism.
There is no demise of the subject or extinction of the original in Kim’s recent work. Originals coexist with the artist’s subjects. No ‘intertextuality’ (Roland Barthes) can be found in her work. in other words, Kim’s text coexists with Jeong Seon’s. Her work makes ensures a contrast and distinction between two texts remains. There is no erased Joeng Seon, and no erased folk painting, is in her work. Her originals are not dead, but live together in the work, whether as subject or original.
3.
Is there any way of reaing Kim’s work, out of the context of postmodernism? If there is, what is it? The critical essays by Kho Choog-hwan and Hong Kyoung-han who read her work from the perspective of parody and postmodernism were away from the core issue. They saw her way of textual composition from a remote point of view, not from a point of proximity. The proximity point is of course drawing as a gathering of crystallized lines. “Crystallized from painting to drawing” according to the artist. The following is her response to this.
“As a child, the traditional and modern coexisted ironically in my home. There was a mother-of-pearl workshop run by my father nearby. My father used traditional landscape and bird-and-flower paintings as sketches for his large-scale, lacquer mother-of-pearl vessel. The workshop brimmed with traditional paintings, and I used to view the collections of mountain-and-water paintings and folk paintings. I was strangely drawn to the workshop’s mystic, weird atmosphere. There were spectacles of an unreal East long ago. The memories of this time remain vague! In recent years, these memories revived ike a miracle. While viewing a collection of folk paintings, I recalled memories of my childhood days. Strange yet familiar images began filling my canvas. (Excerpts from Artist’s Statement in 2005.)
The above statement candidly reveals why she reached the recent aspects of her work. She intends to embody hybrid images of the traditional and modern, and express image of traditional painting through a contemporary feel by using crystals and pseudo-gems. The core issue in her work is to transform painting into drawing. Her response continues:
“In Transferred Painting, weird rocks and bizarre stones look like people’s appearances. I felt interest in metaphorically drawing the folk painting Geumgang Mountain after appropriating its main images. I transformed these rocks to th figures of our times, and transformed this painting numerical values of the elements I selected from the original. I intended to show Oriental panoramas by linking three scenes of yellow, blue, and red. (Excerpts from the Artist’s Statement in 2006.)
Kim’s line paintings seem rooted in ‘Oriental panorama’, appropriating the concepts of ‘transference’ and ‘selection’. It means shse recreated the ‘Oriental spectacles’ she experienced as a child as works of our times.
Through this attempt, she may bring about the atmosphere of postmodernism and deconstructionism in her work. However, this cannot be a fundamental solution. As she mentioned in her statement, she has to emphasize that “We understand the present past and the past as the present by mediating between the past and the present.” (Artist’s Statement in 2007) We read her work in the frame of neo-historicism to grasp this intention. We also have to note she understands the matter of lines in this context.
The understanding of time is a keyword in neo-historicism. When interpreting neo-expressionism, this keyword includes past incidents and narratives such as myths, religions, wars, and traumas elucidated through present time. For its critical understanding, our criticism has to address the conjunction and disjunction of past and present time. Art sociology should support neo-historicism to address it rightly. It has to elucidate how these two kinds of time is in conjunction or disjunction.
4.
Line is the core of Kim’s work. It refers especially to the crystallized line. This signifier denotes an iconic symptom as space-time, past coexisting with the present, mediating the past and present. The artist expresses the coexistence of the past (Gyeomje’s brushstokes) and the present (Kim’s artificial lines), embraced sd evidence of ‘similarity’ and ‘extension’. These lines all signify time linking past to the present. Kim structures it space of time. If the two modes of time are reversed and form identical space-time, it becomes a paradox. Kim Gyeomje’s lines and her own, within the symmetry of time.
In her work, two temporal axes meet for a while. Departing from the past and present, her work recalls the emptiness of time, that is, timelessness. The lines appearing in Kim’s work have the features of timeline crossing over the boundaries between the past and present. These are congealed lines in the boundary of timelessness. These lines are also an extension of past and present time. They are not Euclidean lines but the lines linking time to time and Riemannian lines. In her work, the delicacy and flexibleness of Gyeomje’s vertical brush lines and her crystal lines symbolic of contemporary human’s desire for transparency, flamboyance, and luxuriousness connote the contrasting relationship between past humanistic nature and present de-humanistic nature.
In terms of the signified, two types of lines in her work are otherized each other. The lines are a symbol for fetishism and consumer society. Swarovski she uses for her work’s primary material is to represent contemporary human’s fetishism and kitsch governing their lives. What these two lines connote is characterized by contradiction, hybridization, and disjunction. He work conceals her work’s kitschy trait by the use of Swarovski’s showy appearance, putting importance on the rhetoric of fantastic spectacles. Kim’s fundamental intension lies in this point.
Kim’s recent work presents lines as a visual language in between past and present. In this process, importance is placed on illusion as spectacle, (unrelated to Jean Baudrillard’s simulacra, incidentally). It is an inevitable outgrowth of such a temporal connection. The spectacles that define her work are in no way space-centered, as in deconstruction or postmodernism. These are spectacles derived from a temporal connection. These spectacles exude an aura of the multi-dimensional world of time that exists as a paradox, not as a dualism by postmodernists, between the real and imaginary. It is Kim’s spectacle, in a true sense.